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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문예사조, 프랑스 문학사문학 2024. 3. 10. 00:53
바로크
바로크 사조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으며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문학사에서 17세기는 앙리 4세가 서거한 뒤 1610년부터 루이 14세가 죽은 1715년까지의 기간을 뜻한다. 루이 14세의 절대왕권을 정점으로 엮어지는 17세기는 프랑스에 있어 황금시대라 일컬을 만한 시기였다. 17세기의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전 유럽에 군림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예술에 있어서도 명실공히 유럽의 중심이었다. 흔히 루이 14세와 고전주의 시대로 알려져 있는 이 시기는 봉건주의에서 군주체제로의 전환과 더불어 복합적이고 다양한 배경에 놓여 있었다. 정치적으로 절대왕권의 확립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의 섭정으로 인한 정치 공백, 리슐리외와 마자랭 등 두 재상과 제후 사이의 갈등, 프롱드의 난 등 여러 시련과 투쟁을 겪어야 했다.
바로크라는 말은 포르투갈어로 '모양이 고르지 못한 진주'를 의미하며 건축 및 조형미술의 특이한 경향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바로크의 특이한 경향은 움직임과 행동에 있어서의 힘과 역동성이다. 고전적 예술이 안정과 조화의 인상을 주는 데 반해 바로크 예술은 폭풍이나 광란의 물결 속과 같은 격동과 불안정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물은 바로크 예술가들이 즐겨 선택하는 주제이며 많은 바로크 예술가들이 샘과 분수를 제작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시는 인물과 장치의 탈바꿈, 돌연한 변화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변신의 예술이 더욱 활짝 피어오른 것은 연극에서였다. 변장과 마스크 같은 장치들은 연극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고전주의가 현실에서 본질적이고 의미 있는 것만 나타내는 데 반해서, 바로크는 최대한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장황하고 수다스러운 묘사를 이용한다. 바로크 조형예술이 종교적, 신비적 감정의 격렬한 움직임을 새기는 것같이 문학에서도 광란하는 격한 감정이 표현된다. 대표적인 프랑스 바로크 작가인 모리에르, 라시누, 라포엘, 코르네이유스 등은 작품 속에서 상류사회와 권력, 사랑과 욕망을 다루며 언어의 미적 가치와 풍부한 상징성을 강조했다.
고전주의
바로크 문학이 17세기 문예사조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통상적으로 17세기는 고전주의의 시대로 통칭된다. 프랑스 고전주의 사조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발전했다. 고전주의 사조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을 따른 것으로 합리적이고 명료한 표현, 규칙적인 구조, 도덕적인 가치를 중시한다.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몰리에르, 라퐁테뉴, 보알레르 등이 있으며 그들의 작품은 사회 비판, 도덕적 갈등, 인간 심리 등을 다루고 엄격한 언어와 장르적 형식을 따른다.
17세기는 연극의 세기이므로 고전주의를 이해하려면 우선 고전극을 이해해야 한다. 라신(Racine)에 의해 순수비극의 전형이 완성되기까지 비극은 수많은 변모를 거쳤다. 비극의 규칙은 외적으로 삼일치법칙, 내적으로 진실다움과 어울림의 규칙으로 완성됐다. 삼일치법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고대극의 실례에서 추출된 것으로 사건의 일치, 시간의 일치, 장소의 일치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일치이다. 그러나 고전극의 특성은 외적 규칙보다 내면적 원리인 진실다움과 조화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고전주의의 특성은 무엇보다 뚜렷한 사회적 성격이다. 당대의 작가들은 교양인들, 즉 문화적 유산과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계급인 상류귀족과 지식인들을 위해 문학 작품을 썼다. 문학은 사교생활의 연장이나 마찬가지였고 특히 연극은 사회적 의식으로 볼 수 있었다. 한 사회와의 내면적 공감을 바탕으로 한 문학이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고전극에서 구현된 시대의 도덕은 질서와 규율에 대한 관심이었고, 이는 곧 인간 보편적인 본질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고전주의 문학은 실존의 문학이라기보다 본질의 문학이며 관념, 개념의 문학이었다.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에 유럽에서 등장한 사조로 프랑스 문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낭만주의는 감성과 상상력을 중시하며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감정적인 내면을 표현하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인 장자크 루소는 "어느 무엇으로도 채워 줄 수 없는 설명되지 않는 공허함과 하나의 다른 종류의 쾌락으로 달리는 마음의 충동을 내 속에서 발견했다. 그 쾌락이 어떤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가 말한 공허함과 욕구는 루소 자신이 창안안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형성되어 있던 시대정신을 표현해 낸 것이었다. 또한 루소는 자연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감정이 넘쳐 흐르고 끊임없이 생성되고 유전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새로운 자연관을 이끌어냈다. 스탈 부인과 샤토 브리앙과 같은 작가들은 루소의 뒤를 이은 낭만주의의 선구자들이었다. 그들은 흩어져 있던 감수성에 모범적인 표현과 예술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부여함으로써 낭만주의 문학의 큰 틀을 마련했다.
빅토르 위고는 1827년 극작품 <크롬웰>을 발표하면서 긴 서문을 붙였는데, 문학의 시대를 '창세기의 서정시 시대', '호머의 서사시 시대', '기독교와 함께 시작된 드라마 시대' 세 개의 시기로 구분했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이중적인 존재이므로 극 역시 비극적인 요소와 희극적인 요소, 숭고한 것과 기괴한 것을 종합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고는 고전주의 미학이 인간의 총체로부터 추한 부분을 제거하고 이상화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해서 일반화했다고 비난했다. 낭만주의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감정과 감각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서정문학이다. 프랑스 낭만주의 운동의 주조를 이룬 것은 시적 감수성이었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보들레르, 르메르, 고티에 등이 있다. 그들의 작품은 사랑, 자연, 동경과 열망 등을 다루고 있고 감성적인 언어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낭만주의는 개인적인 감성과 정신을 주된 주제로 삼았으므로 사소설의 발달을 불러왔고 소설은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인간 세계의 모든 일을 다룰 수 있었으므로 낭만주의 정신에 들어맞는 최적의 예술양식이 되었다. 사소설 최초의 걸작은 샤토브리앙의 <르네>로 불안과 우울에 빠져있던 낭만적인 주인공의 영혼이 잘 묘사되어 있다. 콩스탄의 <아돌프>, 스탕달의 <적과 흑>,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레 미제라블> 등은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사실주의
어떤 시대든 공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문학이 있었고 이에 대응하여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문학, 특히 지배계층으로부터 소외된 부류의 인간 모습에 주목하는 문학이 등장하곤 했다. 현실에 주의를 기울여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문학 경향을 사실주의(realism)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 사실주의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세기 중반이며 문예사조로서 사실주의라 부른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을 일컫는다.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프랑스에서 탄생했다. 프랑스 사실주의는 세계 각국의 사실주의 중에서도 가장 명확한 형태를 지녔고, 다른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탕달은 1830년 <적과 흙>에서 "소설, 그것은 길을 따라 들고 다니는 거울이다"라고 표현했다. 이는 소설이 한 사회의 거울 역할을 한다는 19세기의 반영이론의 시초로 볼 수도 있다. 1835년 발자크는 <세라피타>에서 "그들은 마음 속에 아무리 미미한 변화라도 남김없이 자연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내 속에도 정신계가 원인과 결과를 다 함께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이 있다."라고 밝혔다. 거울에는 여과 장치가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것이다. 사실주의 문학은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던 고전주의 문학과도 다르고, 개인의 관념과 열정의 세계를 그린 낭만주의 문학과도 달랐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사실주의는 현실적인 사건과 사회적 현실을 다루는 것을 중시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 에밀 졸라, 모파상 등이 있다. 그들의 작품은 사회 문제, 정치적인 이념, 사실과 허구의 경계 등을 다루며 명확하고 객관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자연주의
프랑스에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이미 1850년부터 싹이 트고 있었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시조로 여겨지는 발자크의 <인간희극>은 1829년 발표되기 시작했으며, 졸라의 <테레즈 라캉>은 사실주의의 기반을 확고하게 했다. 졸라는 위스망스, 모파상 등가 함께 소설집 <메당의 저녁시간>을 발표하면서 동시에 또 <실험소설론>을 발표해 자연주의 문학을 견인했다. 졸라는 <실험소설론>에서 "화학자가 무기물에 대해 실시하는 것과 같이, 생리학자가 유기물에 대해 실시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성격에 대해, 정열에 대해, 인간사회의 현상에 대해 절개수술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1869년대 프랑스의 중심 사조는 콩트의 실증주의 사상을 이어받은 자연주의 이론가 텐(Taine)의 실증주의 철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텐은 과학적 비평을 확립하고자 했는데 작가의 주요한 특징, 주요기능을 발견하고자 노력했고, 그것을 문화 발달의 3대 원동력인 '인종, 환경, 시대'의 영향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마침내 비평은 텐에 의해서 과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당대의 주류 과학은 생물학과 사회학이었다. 과학적 방법을 문학이론에 도입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베르나르의 <실험의학서설> 등이었다.
상징주의
상징주의 시와 시론은 이미 19세기 중엽 보들레르에 의해서 작품화된 바 있으나 프랑스 문학 운동의 하나로 떠오르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상징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적인 문학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소설이나 희곡, 철학사상까지 상징주의적 시적 영감의 영향을 받게 됨으로써 상징주의는 한 시대의 지배적인 문학사조가 되었다. 자연주의의 선구자였던 텐은 사실주의를 '현대사상의 지주'라고까지 장담했으나 1880년경부터 사실주의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베르그송, 포앵카레 등의 철학자, 과학자들은 과학 및 실증주의 사상이 내포하는 결함과 오류, 인간 인식의 상대성을 지적했다. 대중들은 과학숭배 풍조에 너무 큰 기대를 걸었다가 결국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민감한 시대적 지침을 얻게 된 사상적 조류는 조악한 과학결정론에 반하여 신비와 불가지 세계로 기울어지고 논리에 대항해 직관의 힘을 강조하는 등 현실의 추악상보다는 그 뒤에 있는 이상으로 향하는 새로운 기호와 욕구로 관심이 모이게 됐다.
이때까지 대중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저주받은 시인들, 보들레르와 베를렌, 말라르메, 랭보 등이 사랑받기 시작했다. 19세기의 서정시는 보들레르에 의해 전환기를 맞이했다. 시가 곧 신앙의 대상이 되며 시인은 신에 의해 이 세상에 보내진 절대적 미의 구도자로서 신앙화되었다. 보들레르의 시는 대부분 교감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자연이나 타인과의 교감을 노래하고 있는 시구가 많다. 중요한 것은 시의 기법이 아니라 '사물의 말을 깨닫는' 시인의 경제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교감 시학을 전제로 할 때 예술은 곧 매음이라는 시론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이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기를 내주고 일체가 되어 황홀감을 나누는 것, 만인에게 개방되고 공유되는 인간 사이의 교감의 향연이라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는 랭보에 이르러 매우 과격해지며 초자연의 견자에 도달하고자 하는 탐험과 이심전심의 보편적 언어의 탐구로 이어졌다. 랭보는 "나라는 것은 또 다른 사람이다"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는 시인이 고행을 통해 인간에게 미지의 세계를 열어주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가 말한 '나'는 사회적인 나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나도 아닌 절대에 도달한 견자의 자아인 것이다.
초현실주의
20세기 초, 서구문명이 몰락과 위기에 들어서면서 초현실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초현실주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랭보, 로트레아몽 같은 시인에서부터였지만 하나의 집단적 운동으로 구체화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시적 수단으로서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추상적인 탐구로부터 출발해 인간의 자유는 언어의 자유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고 사고와 정신 개혁에 관심을 쏟았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의도는 인간 내면 속에 감춰진 원시적인 힘을 의식의 여과과정 없이 그대로 표현해 냄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자동기술은 사고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한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에 흥미를 느낀 브르통(Breton)은 의식의 절제 과정을 통해 표현된 시보다 인간 내면 속에 억압된 욕망과 꿈, 잠재의식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작업, 즉 자동기술이라 불리는 언어의 자유를 기도했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이념으로만 외치지 않고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모로코 독립전쟁의 발단이 계기가 되어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자기 반성과 함께 개인 혁명을 투쟁으로 삼았다. 브르통은 모든 정신적 작품이 세계의 생존조건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해야만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면서 초현실주의의 체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후 엘뤼아르, 아라공, 페레, 브르통이 줄줄이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는데 초현실주의를 혁명에 시키고 싶지 않아 했던 그들도 당시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흐름이 원인이었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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